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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누스의 기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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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은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가 교황 실베스테르 1세에게 로마와 서방 제국을 넘기고 자신은 동방 제국의 황제권을 갖는다는 내용을 담은 문서이다. 이 문서는 교황이 황제보다 우위에 있으며, 세속 권력을 결정할 수 있다는 주장의 근거로 사용되었으나, 8세기 중엽에 처음 등장하고 315년에 발행되었다는 주장과 달리 역사적 오류를 포함하고 있어 위조된 것으로 밝혀졌다. 중세 시대에는 교황권 강화를 위한 중요한 문서로 여겨졌으나, 르네상스 시대에 들어 위조임이 밝혀졌고, 종교 개혁에도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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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누스의 기증
개요
유형가짜 로마 제국 칙령
제목 (라틴어)Constitutum Donatio Constantini (콘스티투툼 도나티오 콘스탄티니)
다른 제목 (라틴어)Constitutum domini Constantini imperatoris (콘스티투툼 도미니 콘스탄티니 임페라토리스)
제작 시기8세기
폭로 시기15세기
역사적 배경
내용콘스탄티누스 1세교황 실베스테르 1세에게 로마와 서방 지역에 대한 통치권을 이양했다는 내용
교황에게 라테라노 궁전, 로마 시, 이탈리아 전체, 그리고 서방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부여
로마 교회를 다른 교회들 위에 두는 내용
교황을 황제보다 높은 위치에 두는 내용
목적교황권 강화 및 교황령의 정당성 확보
위조 사실
폭로15세기, 니콜라스 쿠사누스와 로렌초 발라에 의해 위조 사실이 밝혀짐
문서의 언어와 문체가 콘스탄티누스 시대와 맞지 않음
역사적 사실과 모순되는 내용 포함
중요성중세 시대 교황권 강화에 기여
종교 개혁의 원인 중 하나
역사적 문서 위조의 대표적인 사례
영향교황의 권위 실추
교회 개혁 운동 촉발
역사 연구의 중요성 부각
추가 정보
관련 작품콘스탄티누스 기증 (회화)
ISBN978-1-57958-282-1

2. 기원과 내용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은 5세기 《실베스테르 행적》에 기반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여기에는 성인 실베스테르 교황이 로마 시민들을 지역 용의 횡포로부터 구출하고, 세례를 통해 황제의 나병을 기적으로 치료했다는 내용이 묘사되어 있다.[6]

이 문서가 처음 세상에 나온 것은 8세기 중엽으로, 교황 스테파노 2세프랑크 왕국의 궁재 피핀 '단신왕'의 협상 과정에서였다.[44] 당시 교황 스테파노 2세는 피핀을 만나 메로빙거 왕조를 대신해 피핀의 카롤링거 왕조를 새로운 왕조로 세웠고, 그 대가로 피핀은 롬바르드족이 점령한 이탈리아 영토를 되찾아 교황에게 주었다. 이 영토는 이후 약 11세기 동안 지속된 교황령의 기초가 되었다.

콘스탄티누스의 기증 문서의 초기 초고는 8세기 중반 이후에 작성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는 교황 스테판 2세가 프랑크 왕궁 재상이었던 피핀과의 협상을 돕기 위해서였다.[9][10] 754년, 교황 스테판 2세는 알프스 산맥을 넘어 피핀을 왕으로 즉위시켰고, 카롤링거 가문이 메로빙거 왕가를 대체할 수 있게 되었다. 스테판 2세의 지원에 대한 보답으로 펩핀은 롬바르드족이 동방 제국으로부터 빼앗은 이탈리아 땅을 교황에게 주었다.[11] 스테판 2세의 후계자인 교황 바오로 1세의 서기관에서 기원했을 가능성도 있다.[5]

다른 해석에 따르면,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은 콘스탄티노플을 겨냥한 공식적인 위조 문서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콘스탄티누스와 관련 있는 라테라노의 지위를 신흥 바티칸에 맞서 강화하기 위한 로마 교회 정치적 책략이었다. 그리고 로마 수도원에서 일하는 그리스 수도사가 작성했을 가능성도 있다.[5] 한 연구에서는 위조 문서의 시기를 9세기로, 작성 장소를 프랑스 북부의 코르비 수도원으로 추정하려는 시도가 있었다.[12]

독일 중세학자 요하네스 프리드는 콘스탄티누스의 기증과 그 이전의 위조된 문서인 「콘스탄티누스의 칙령」을 구분한다. 후자는 9세기 후반에 편찬된 위조 문서 모음인 「가짜 교령」에 포함되어 있다. 프리드는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이 훨씬 짧은 「콘스탄티누스의 칙령」을 확장한 후대의 문서라고 주장한다.[12] 크리스토퍼 B. 콜먼은 「콘스탄티누스의 칙령」에서 언급된 "서부 지역"의 기증이 롬바르디아, 베네토, 이스트리아 지역을 가리킨다고 이해한다.[13]

이 문서는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로마 제국의 수도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기면서 작성된 것으로, 오비니우스 갈리카누스[4]를 언급하고 있으나 역사적 기록에 따르면 이 두 사람은 동시에 집정관을 역임한 적이 없다는 점은 이 문서의 위조임을 나타내는 증거이다.

2. 1. 주요 내용

이 문서는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로마 제국의 수도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기면서 로마 도시와 서방 제국교황 실베스테르 1세[41]와 그의 후계자들에게 넘기고 자신은 동방 제국의 황제권을 보유한다는 내용으로 되어있다. 이 문서에 따르면 콘스탄티누스는 자신을 문둥병 치료를 구하고[42] 회심하고 세례를 받아[43] 기독교인 된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선물한 것이라고 한다.[43]

따라서 교황은 황제보다 더 우위에 있으며 신성한 권력의 대표자로 교황이 세속의 황제를 결정하고 심지어 교체할 수도 있다고 해석된다. 이 문서가 세상에 처음 나온 것은 8세기 중엽으로 교황 스테파노 2세프랑크 왕국의 궁재 피핀 ''단신왕''의 협상과정에서 나왔다.[44]

이 문서는 5세기의 《실베스테르 행적》(Acts of Sylvester)에 기초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이야기는 성인 실베스테르 교황이 로마 시민들을 지역 용의 횡포로부터 구출하고, 세례(baptism) 성사(Sacraments of the Catholic Church)를 통해 황제의 나병(leprosy)을 기적으로 치료했다고 묘사한다.[6] 감사하는 마음으로 콘스탄티누스는 베드로의 자리에 "권력과 영광의 존엄성, 활력, 황제의 영예"와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크, 예루살렘, 콘스탄티노플의 네 주요 주교좌뿐 아니라 온 세상의 모든 교회에 대한 최고 권위"를 수여하기로 결정했다.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교회의 유지를 위해 그는 유대, 그리스, 아시아, 트라키아, 아프리카, 이탈리아와 여러 섬에 토지를 하사했다. 실베스테르와 그의 후계자들에게는 황제의 휘장, 티아라, 그리고 "로마 시와 이탈리아의 모든 주, 장소, 도시, 그리고 서부 지역"도 하사했다.[7][8]

이 기증은 콘스탄티노플의 권위를 축소하려는 시도였다. 만약 콘스탄티누스가 330년 콘스탄티노플의 헌정 이전에 실베스테르를 황제의 지위로 격상시켰다면, 로마의 총대주교는 여러 주교좌 중 최고의 지위를 놓고 경쟁에서 약 15년의 우위를 점하게 된다. 암묵적으로 교황청은 제국의 자리를 옮길 수 있는 최고 권위와 특권을 주장했다. 교황청은 콘스탄티누스에 의한 제국 중심지 이동(translatio imperii)에 동의했으며, 언제든지 그 권위를 되찾을 수 있었다.[5]

이 문서의 내용은 서간 형식으로 작성되어 있으며, 315년 3월 30일에 작성된 것으로 되어 있다.[31] 먼저 콘스탄티누스 1세(콘스탄티누스 대제)는 한센병을 앓았고, 당시 교황 실베스테르 1세의 기도로 구원받았다고 한다. 콘스탄티누스는 실베스테르 1세를 황제로 삼으려 했으나, 실베스테르 1세는 황관을 한 번 받았지만 쓰지 않고, 다시 콘스탄티누스 1세에게 황관을 씌워주었다고 한다. 다음으로 성 베드로(사도 베드로)를 향하는 형식으로, 콘스탄티누스에 의한 안티오키아, 알렉산드리아, 예루살렘, 콘스탄티노폴리스와 다른 모든 교회에 대한 우월권, 황제의 문장과 라테라노 궁전의 하사, 서방 속주에서의 황권을 교황에게 양도했다는 기증의 기록을 적는다.

3. 역사적 배경 및 영향

콘스탄티누스 1세로마 제국의 수도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기면서 로마 도시와 서방 제국교황 실베스테르 1세[41]와 그의 후계자들에게 넘기고 자신은 동방 제국의 황제권을 보유한다는 내용의 문서가 바로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이다. 이 문서에 따르면 콘스탄티누스는 나병 치료를 받고[42] 회심하여 세례를 받아[43] 기독교인이 된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이 문서를 선물했다고 한다.[43]

이 기증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권위를 축소하려는 시도였다. 만약 콘스탄티누스가 330년 콘스탄티노플 헌정 이전에 실베스테르를 황제의 지위로 격상시켰다면, 로마의 총대주교는 여러 주교좌 중 최고의 지위를 놓고 경쟁에서 약 15년의 우위를 점하게 된다. 암묵적으로 교황청은 제국의 자리를 옮길 수 있는 최고 권위와 특권을 주장했으며, 콘스탄티누스에 의한 제국 중심지 이동(translatio imperii)에 동의했고, 언제든지 그 권위를 되찾을 수 있었다.[5]

이 문서는 5세기 실베스테르 행적에 기초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이야기는 성인 실베스테르 교황이 로마 시민들을 지역 용의 횡포로부터 구출하고, 세례 성사를 통해 황제의 나병을 기적으로 치료했다고 묘사한다.[6] 이 이야기는 《교황 연대기》에 기록되었으며, 8세기 후반에는 용을 물리친 실베스테르와 그의 사도 계승자들이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에서 실제로 역사적 로마 주교들이 행사한 적이 없는 세속 권력을 부여받았다고 전해진다.

이 문서의 내용은 콘스탄티누스의 제국 권력 이전(translatio imperii)이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플(새로운 로마)로 옮겨졌다는 비잔티움 제국의 견해와 모순되었다. 따라서 이 기증은 로마와 새로운 로마의 총대주교 관구의 교회적 우위를 둘러싼 동서 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5]

서간 형식으로 작성되어 있으며, 315년 3월 30일에 작성된 것으로 되어 있다.[31] 먼저 콘스탄티누스 1세는 한센병을 앓았고, 당시 교황 실베스테르 1세의 기도로 구원받았다고 한다. 콘스탄티누스는 실베스테르 1세를 황제로 삼으려 했으나, 실베스테르 1세는 황관을 한 번 받았지만 쓰지 않고, 다시 콘스탄티누스 1세에게 황관을 씌워주었다고 한다.

Constitutum Donatio Constantinila라는 제목의 이 문서는 315년 3월 30일에 작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역사적 기록에 따르면 콘스탄티누스 1세의 네 번째 집권(315년) 당시 공동 집정관이었던 갈리카누스(Ovinius Gallicanus)는 317년에 집정관을 역임했기에[4] 두 사람이 동시에 집정관을 역임한 적이 없다는 점에서 위조임을 알 수 있다.

3. 1. 중세 교황권 강화

콘스탄티누스 1세로마 제국의 수도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기면서 로마서방 제국교황 실베스테르 1세[41]와 그 후계자들에게 넘기고 자신은 동방 제국의 황제권을 보유한다는 내용이 이 문서에 담겨있다. 콘스탄티누스는 문둥병 치료를 받고[42] 회심하여 세례를 받아[43] 기독교인이 된 것에 감사하며 이 선물을 바쳤다고 한다.

이에 따라 교황은 황제보다 우위에 있으며, 신성한 권력의 대표자로서 세속 황제를 결정하고 교체할 수 있다고 해석된다. 이 문서는 8세기 중엽 교황 스테파노 2세프랑크 왕국의 궁재 피핀 '단신왕'의 협상 과정에서 처음 등장했다.[44] 교황 스테파노 2세는 피핀을 통해 메로빙거 왕조를 대신하여 카롤링거 왕조를 세웠고, 피핀은 롬바르드족이 점령한 이탈리아 영토를 되찾아 교황에게 주었다. 이 영토는 이후 약 11세기 동안 존속한 교황령의 기초가 되었다.

이 문헌은 4세기 로마 황제가 로마교회 대주교에게 영토 권한과 우위를 인정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서방교회 지역 중세 동안 이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은 세속 (서방 황제 및 동방 황제) 황제에 대한 교황의 우위권을 뒷받침하는 근거 문서로 사용되었고, 역대 교황들과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등 성직자들은 교회 이익을 위해 황제권과 충돌할 때마다 이 문서를 내세웠다.

교황 하드리아노 4세는 신성 로마 제국의 프리드리히 1세에게 보낸 편지에서 황제의 제관은 교황 소유이며 황제에게 사용을 위임한 것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교황은 이미 콘스탄티누스 대제로부터 서방세계 전체를 기증받았고, 제국은 교황이 황제에게 수여한 봉토라는 이론을 세우고자 했다.

콘스탄티누스는 베드로의 자리에 "권력과 영광의 존엄성, 활력, 황제의 영예"와 "알렉산드리아(Alexandria), 안티오크(Antioch), 예루살렘(Jerusalem),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의 네 주요 주교좌뿐 아니라 온 세상의 모든 교회에 대한 최고 권위"를 수여하기로 결정했다.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교회의 유지를 위해 유대(Judaea (Roman province)), 그리스(Greece), 아시아(Asia (Roman province)), 트라키아(Thrace), 아프리카(Africa (Roman province)), 이탈리아(Italy)와 여러 섬에 토지를 하사했다. 실베스테르와 그의 후계자들에게는 황제의 휘장, 티아라, 그리고 "로마 시와 이탈리아의 모든 주, 장소, 도시, 그리고 서부 지역"도 하사했다.[7][8]

800년 프랑크 왕국카롤루스 대제 즉위는 이 위서를 근거로 행해졌다. 이후 교황은 황제보다 우월한 지위에 있다고 여겨졌다.

중세 로마 교황과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사이의 서임권 투쟁과 동방 교회와의 대립에서도 가톨릭 교회의 독립성을 주장하기 위해 이 문서가 인용되었다.

11세기 이후에도 이 문서는 세속 권력과 황제에 대한 교황의 우월성("세계는 로마 교황에게 속한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사용되었다.

3. 2. 동서 교회 분열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은 778년 교황 하드리아누스 1세가 카롤루스 대제에게 보낸 편지에서 처음 언급된 것으로 여겨진다. 하드리아누스 1세는 카롤루스 대제에게 콘스탄티누스의 예를 따라 로마 가톨릭 교회에 기증할 것을 촉구했다. 오토 3세의 왕실 사무국은 그 기증의 진위를 부정했다.[19]

교황 레오 9세는 1054년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미카엘 1세 케룰라리우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문서를 인용하며 그 진위를 믿었다.[15][16] 이는 결국 동서 교회 분열을 심화시키는 논쟁으로 이어졌다. 11세기와 12세기에는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이 교황청과 서방 세속 권력 사이의 서임권 투쟁에서 자주 인용되었다.[14]

이 문서는 콘스탄티누스 1세의 제국 권력 이전이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플(새로운 로마)로 옮겨졌다는 비잔티움 제국의 견해와 모순되었다. 따라서 이 기증은 로마와 새로운 로마의 총대주교 관구의 교회적 우위를 둘러싼 동서 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5] 움베르토 추기경 또한 교황청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이 문서를 사용하여 동로마 제국의 황제와 총대주교의 우위에 맞섰다.[5]

12세기에는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이 그리스어로 번역되었으며, 14세기 사본이 남아 있다. 비잔티움 제국의 저술가들 또한 논쟁에서 이 기증을 사용했다. 동로마 황제 마누엘 1세 콤네누스 시대에 저술한 요한 킨나모스는 서방의 호엔슈타우펜 황제들을 찬탈자로 비난하고 교황이 황제 직위를 부여할 권리가 없다고 주장했다.[5] 테오도르 발사몬은 1054년 미카엘 케룰라리우스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 기증을 사용하여 교황 사절단의 해임과 그 뒤를 이은 상호 파문에 대한 근거를 제시했다.[5]

1248년, 산티 콰트로 코로나티 대성당의 성 실베스터 예배당에는 로마에서의 세례와 콘스탄티누스의 기증 이야기를 보여주는 프레스코화가 장식되었다.[17]

14세기 초, 단테 알리기에리신곡에서 "아, 콘스탄티누스여, 얼마나 많은 악의 어머니였던가! 네 개종이 아니라, 첫 부유한 교황이 네게서 받은 그 기증이었지!"라고 적었다.[18]

800년 프랑크 왕국카롤루스 대제 즉위는 이 위서를 근거로 행해졌다. 이후 교황은 황제보다 우월한 지위에 있다고 여겨졌다. 중세로마 교황신성 로마 제국 황제 사이의 서임권 투쟁에서도 근거로 제시되었고, 동방 교회와의 대립 문제에서는 가톨릭 교회의 독립성을 주장하기 위해 인용되었다.

11세기 이후에도 세속 권력과 황제에 대한 교황의 우월성("세계는 로마 교황에게 속한다"는 주장)의 근거로 사용되었다.

4. 위조 폭로와 그 이후

라파엘로 화실, ''콘스탄티누스의 기증''. 라파엘로의 방, 바티칸 시국


콘스탄티누스 기증 문서의 초기 초고는 8세기 중반 이후에 작성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는 교황 스테파노 2세프랑크 왕국의 궁재였던 짧은 펩핀과의 협상을 돕기 위해서였다.[9] [10] 754년, 교황 스테파노 2세는 알프스 산맥을 넘어 펩핀을 왕으로 즉위시켰고, 이로써 카롤링거 왕조가 메로빙거 왕조를 대체할 수 있게 되었다. 펩핀은 스테파노 2세의 지원에 대한 보답으로 롬바르드족에게서 빼앗은 이탈리아 땅을 교황에게 주었다.[11] 이 땅은 교황령이 되어 이후 11세기 동안 교황권의 세속 권력 기반이 되었다. 교황 바오로 1세의 서기관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도 있다.[5]

다른 해석에 따르면,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은 콘스탄티노플을 겨냥한 공식적인 위조 문서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콘스탄티누스와 관련 있는 라테라노의 지위를 신흥 바티칸에 맞서 강화하기 위한 로마 교회 정치적 책략이었다. 로마 수도원에서 일하는 그리스 수도사가 작성했을 가능성도 있다.[5] 한 연구에서는 위조 문서의 시기를 9세기로, 작성 장소를 프랑스 북부의 코르비 수도원으로 추정하려는 시도가 있었다.[12]

독일 중세학자 요하네스 프리트는 콘스탄티누스의 기증과 그 이전의 위조된 문서인 「콘스탄티누스의 칙령」(Constitutum Constantini)을 구분한다. 후자는 9세기 후반에 편찬된 위조 문서 모음인 「가짜 교령」에 포함되어 있다. 프리드는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이 훨씬 짧은 「콘스탄티누스의 칙령」을 확장한 후대의 문서라고 주장한다.[12] 크리스토퍼 B. 콜먼은 「콘스탄티누스의 칙령」에서 언급된 "서부 지역"의 기증이 롬바르디아, 베네토, 이스트리아 지역을 가리킨다고 이해한다.[13]

니콜라오 2세가 시칠리아를 로베르토 기스카르도에게 부여한 이후 발전한 "만능 섬" 교황 봉토 교리는, 아메리카와 몰루카 제도에서 이베리아 왕국의 중복되는 주장에 대한 교황의 선언에서 1492년 이후에 배치되었고, 인테르 카에테라는 교황령으로 토르데시야스 조약사라고사 조약을 초래했다.[17][25]

일부는 여전히 그 진위를 주장했고, ''교회 연대기'' 이후 거의 한 세기 후에 크리스티안 볼프는 여전히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을 논쟁의 여지가 없는 사실로 언급했다.[26]

4. 1. 르네상스 시대의 비판

르네상스가 시작되고 고전에 대한 이해가 넓어지면서 이 문서의 진위에 대한 의문이 늘어났다. 1440년 이탈리아의 인문주의자 로렌초 발라는 이 문서에 표기된 조잡한 라틴어가 4세기경, 즉 콘스탄티누스 대제 시절의 로마 황제들이 사용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증명해 내었다.[45] 발라는 〈증서〉(Declamatio, 1440)[46]에서 익명의 저자가 쓴 '증서'에 나타난 칙령 수준과 거리가 먼 조잡한 라틴어 문체와 후대 표현 방식을 밝혀내고, 인용된 문헌이 4세기 이후의 문헌으로 작성 시기와 불일치한다는 점도 확인하였다. 이에 대하여 교황청은 발라의 논증을 부정하고 발라의 책을 16세기 중반까지 금서목록에 포함시켰다. 그러나 이미 이 문서의 권위는 의심받게 되었고 결국 교회도 위조된 문서라는 사실을 인정하였다.

니콜라우스 오프 쿠사 추기경은 그것이 위조라고 선언[20][21]했고, 위경으로 언급했다. 후에 인문주의자이자 학자인 로렌초 발라는 고문학적 연구에서 원고에 사용된 언어를 4세기로 거슬러 올라갈 수 없다고 주장했다.[22] 본문의 언어는 원고를 8세기로 추정할수 있게 한다. 발라는 위조가 너무 명백해서 교회가 그 문서가 진짜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고 의심했다. 발라는 또한 교황의 세속 권력 찬탈이 교회를 타락시키고, 이탈리아 전쟁을 일으키고, "압도적이고, 야만적이고, 폭정적인 사제 지배"를 강화했다고 주장했다.[22]

쿠사와 발라 외에도, 치체스터 주교(1450-57) 레지날드 피콕도 비슷한 결론에 도달했다.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이 위조라는 징후 중에는 그 언어와, 특정 황제 시대의 공식이 본문에 사용되었지만, 문서의 라틴어 중 일부는 4세기에 쓰일 수 없었던 점이 있었다. "봉토"와 같은 시대착오적인 용어가 사용되었다. 또한, 문서의 추정 날짜는 콘스탄티누스의 네 번째 집정관(315년)과 갈리카누스의 집정관(317년) 모두를 언급하는 것처럼 문서의 내용과 일치하지 않는다.

비오 2세는 교황이 되기 5년 전인 1453년에 기증이 위조임을 보여주는 논문을 썼지만, 출판하지는 않았다.[23]

이탈리아에서 교황 권력의 현대적 반대자들은 유스티니아누스의 ''국부법전''에 구현된 시민법과 시민 관할권의 우위를 강조했다. 피렌체 연대기 작가 조반니 카발칸티는 발라의 논문이 있던 해에 밀라노 공작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가 교황에 대항하는 동맹을 제안하면서 피렌체의 코시모 데 메디치에게 외교적 제안을 했다고 보고했다. 비스콘티는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에 대해 "콘스탄티누스가 실베스테르에게 그렇게 많고 풍부한 선물을 맡겼다고 하더라도 – 그것은 의심스럽다. 그러한 특권은 어디에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 그는 자신의 생애 동안에만 그것을 허락했을 수 있다. 제국은 어떤 영주권보다 우선한다."라고 썼다.

후에 학자들은 실베스테르가 콘스탄티누스를 치료한 것과 같은 다른 요소들이 나중에 유래한 전설임을 증명했다. 발라의 저서를 편집한 볼프람 제츠는 발라의 반박 당시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은 정치 이론에서 현대적으로 관련이 없었고, 법률적 수사학 연습의 기회를 제공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24]

카이사르 바로니우스가 ''교회 연대기''(1588~1607년 출판)에서 위조임을 인정할 때까지 암묵적으로 진품으로 받아들여졌고, 그 후 거의 보편적으로 그렇게 받아들여졌다.[14]

4. 2. 종교 개혁에 미친 영향

오토 3세는 로마 교황청에 대한 증여를 하면서 "금박으로 쓰인" 문서의 위조 가능성에 의문을 제기했을 수 있다.[19] 15세기 중반, 인문주의자들과 교황청 관료들은 그 문서가 진짜일 수 없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니콜라우스 오프 쿠사 추기경은 그것이 위조라고 선언[20][21]했고, 위경으로 언급했다.

이후 인문주의자이자 학자인 로렌초 발라는 고문학 연구에서 원고에 사용된 언어가 4세기로 거슬러 올라갈 수 없다고 주장했다.[22] 발라는 위조가 너무 명백해서 교회가 그 문서가 진짜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고 의심했다. 또한 교황의 세속 권력 찬탈이 교회를 타락시키고, 이탈리아 전쟁을 일으키고, "압도적이고, 야만적이고, 폭정적인 사제 지배"를 강화했다고 주장했다.[22]

쿠사와 발라 외에도, 치체스터 주교(1450-57) 레지날드 피콕도 비슷한 결론에 도달했다.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이 위조라는 징후 중에는 그 언어와, 특정 황제 시대의 공식이 본문에 사용되었지만, 문서의 라틴어 중 일부는 4세기에 쓰일 수 없었던 점, "봉토"와 같은 시대착오적인 용어가 사용된 점 등이 있었다. 또한, 문서의 추정 날짜는 콘스탄티누스의 네 번째 집정관(315년)과 갈리카누스의 집정관(317년) 모두를 언급하는 것처럼 문서의 내용과 일치하지 않는다.

비오 2세는 교황이 되기 5년 전인 1453년에 기증이 위조임을 보여주는 논문을 썼지만, 출판하지는 않았다.[23]

울리히 폰 후텐과 마르틴 루터와 같은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의 저술가들은 발라의 논문을 격렬하게 받아들였고, 이 논문은 16세기 중반에 ''금서 목록''에 실렸다.

카이사르 바로니우스는 그의 ''교회 연대기''(1588~1607년 출판)에서 위조임을 인정할 때까지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은 암묵적으로 진품으로 받아들여졌고, 그 후 거의 보편적으로 그렇게 받아들여졌다.[14]

5. 평가와 현대적 의의

오토 3세가 문서의 위조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했지만,[19] 중세 시대에는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이 진품으로 널리 받아들여졌다. 15세기 중반, 인문주의자들과 교황청 관료들은 문서가 진짜일 수 없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니콜라우스 오프 쿠사 추기경은 위조라고 선언했고,[20][21] 로렌초 발라는 고문학 연구를 통해 문서에 사용된 언어가 4세기의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22] 발라는 교황의 세속 권력 찬탈이 교회를 타락시키고 이탈리아 전쟁을 일으켰다고 비판했다.[22]

레지날드 피콕 주교도 비슷한 결론을 내렸는데, 문서의 언어와 "봉토"와 같은 시대착오적인 용어 사용, 그리고 문서의 추정 날짜와 내용의 불일치를 지적했다. 비오 2세는 교황이 되기 전에 기증이 위조임을 보여주는 논문을 썼지만 출판하지는 않았다.[23]

카이사르 바로니우스는 ''교회 연대기''에서 위조임을 인정했고,[14] 이후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은 거의 보편적으로 위조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크리스티안 볼프와 같이 진위를 주장하는 사람들도 일부 있었다.[26]

5. 1. 중세적 관점

중세 시대 교회는 교황령 형성에 큰 공헌을 한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으며, 황제들은 대관식 전에 이 문서를 인준해야 했다. 이 문서의 진실성을 의심하는 자는 이단으로 간주되었다. 오늘날에는 사료 위조를 매우 불순하게 평가하지만, 중세에는 혼란스러운 세계를 신이 원하는 올바른 질서로 이끌려는 의도로 보아 다르게 평가했다.[47]

현대 역사학자 프리츠 케른은 중세 위조자들의 사고방식을 설명하며, 문서의 진위와 관계없이 신이 정해 놓은 질서에 따라 만들어졌다고 믿었다고 말한다.[47]

중세 역사 전문가 호르스트 푸어만은 중세가 근대와 달리 법과 진실을 이해했다고 지적한다. 중세 사람들에게 사안의 사실이나 정당성을 결정하는 것은 형식적 기준이 아니라 신이었다. 신이 인간의 이성보다 위대했기 때문에, '콘스탄티누스 기증장'이 표명한 교회의 지배권은 신의 의지에서 나온 것이었고, 따라서 이성에 의해 문제될 수 없었다.[48] 이러한 이유로 중세에는 위조범이 재판받는 일이 드물었다.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에 대한 초기 언급은 778년 교황 하드리아누스 1세가 카롤루스 대제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타난다. 하드리아누스 1세는 카롤루스 대제의 아버지 피핀 3세가 피핀의 기증을 통해 교황령에 대한 교황의 주권을 인정한 것을 언급하며, 카롤루스 대제에게 콘스탄티누스의 예를 따라 로마 가톨릭 교회에 기증할 것을 촉구했다. 오토 3세의 왕실 사무국은 그 기증의 진위를 부정했다.[19]

교황령을 직접 언급한 최초의 교황은 레오 9세였다. 그는 1054년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미카엘 1세 케룰라리우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문서의 상당 부분을 인용하며 그 진위를 믿었다.[15][16] 이는 동서 분열로 이어지는 논쟁을 더욱 심화시켰다. 11세기와 12세기에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은 교황청과 서방 세속 권력 사이의 서임권 투쟁에서 자주 인용되었다.[14]

이 문서의 내용은 콘스탄티누스의 제국 권력 이전(translatio imperii)이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플(새로운 로마)로 옮겨졌다는 비잔티움 제국의 견해와 모순되었다. 따라서 이 기증은 로마와 새로운 로마의 총대주교 관구의 교회적 우위를 둘러싼 동서 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5] 움베르토 추기경 또한 교황청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이 문서를 사용하여 동로마 제국의 황제와 총대주교의 우위에 맞섰다.[5]

12세기에는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이 그리스어로 번역되어 존재했으며, 14세기 사본이 남아 있다. 비잔티움 제국의 저술가들 또한 논쟁에서 이 기증을 사용했다. 동로마 황제 마누엘 1세 콤네누스 시대에 저술한 요한 킨나모스는 서방의 호엔슈타우펜 황제들을 찬탈자로 비난하고 교황이 황제 직위를 부여할 권리가 없다고 주장했다.[5] 테오도르 발사몬은 1054년 미카엘 케룰라리우스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 기증을 사용하여 교황 사절단의 해임과 그 뒤를 이은 상호 파문에 대한 근거를 제시했다.[5]

1248년, 산티 콰트로 코로나티 대성당의 성 실베스터 예배당에는 로마에서의 세례와 콘스탄티누스의 기증 이야기를 보여주는 프레스코화가 장식되었다.[17]

14세기 초 단테 알리기에리는 자신의 저서 신곡에서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을 비판했다.[18]

5. 2. 현대적 관점

중세 시대에는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이 진품으로 널리 받아들여졌지만, 오토 3세는 문서의 위조 가능성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19] 15세기 중반, 인문주의자들과 교황청 관료들은 문서가 진짜일 수 없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니콜라우스 오프 쿠사 추기경은 위조라고 선언했고,[20][21] 로렌초 발라는 고문학 연구를 통해 문서에 사용된 언어가 4세기의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22] 발라는 교황의 세속 권력 찬탈이 교회를 타락시키고 이탈리아 전쟁을 일으켰다고 비판했다.[22]

레지날드 피콕 주교도 비슷한 결론을 내렸는데, 문서의 언어와 "봉토"와 같은 시대착오적인 용어 사용, 그리고 문서의 추정 날짜와 내용의 불일치를 지적했다. 비오 2세는 교황이 되기 전에 기증이 위조임을 보여주는 논문을 썼지만 출판하지는 않았다.[23]

현대에 들어서 카이사르 바로니우스는 ''교회 연대기''에서 위조임을 인정했고,[14] 이후 거의 보편적으로 위조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크리스티안 볼프와 같이 진위를 주장하는 사람들도 일부 있었다.[26]

중세의 자료 위조는 오늘날과는 다른 평가를 받았다. 혼란스러운 세계를 신이 원하는 질서로 이끌려는 의도로 해석되었기 때문이다.[47] 중세에는 형식적 기준보다 신의 의지가 중요했기 때문에, '콘스탄티누스 기증장'이 표명한 교회의 지배권은 신의 의지에서 나온 것으로 여겨져 문제되지 않았다.[48]

6. 더불어민주당 관점에서의 추가 분석 (별도 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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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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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서적 교황의 역사 도서출판 길 2013-09-25
[46] 논문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에 대한 로렌초 발라의 논문 1922
[47] 서적 교황의 역사 도서출판 길 2013-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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